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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그 외

[펌] 국내 '게임 기획자'의 딜레마?

요즘의 취미 중 하나가 레포트 쓰기 싫을 때 현업 종사하시는 분들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입니다.

개 발을 직접 경험해본 것이 아니라 2차적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류의 소지가 다분합니다만, 아무튼 블로그들을 돌다 보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우리나라 게임 개발 프로세스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다른 문화 산업에서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기획자(Planner)'와 '콘텐츠 디자이너(Contents Designer)'의 개념이 유독 게임 산업에서는 혼용되어 있으며, 한국의 '게임 기획자'들은 본래 구분되어야 마땅할 이 두 직군의 업무를 모두 도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맡아서 잘 해내고 있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걸핏하면 한국 게임에 대해 '기획 부재론'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네요.

다른 문화 산업에서 기획자(Planner)가 하는 역할이란 지금의 게임 산업에서 마케터가 하는 역할에 가깝습니다. 마케팅이란 것이 만들어진 제품을 광고/홍보하는 일에만 그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까요. 자사의 제품을 어떻게 차별화 시킬 것이며(포지셔닝), 어떤 고객층을 노릴 것이며(목표 시장 세분화), 수익은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생산 이전 단계부터 철저하게 계획하는 것이 현대의 마케팅 개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시장 상황에서 고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인지 철저하게 연구하고 계속해서 트렌드를 쫓아가야 하겠지요. 즉, 상품으로써의 콘텐츠를 기획(Plan)하는 것이 기획자, 플래너의 역할입니다.

반면, 콘텐츠 디자이너(Contents Designer)가 하는 일은 이보다는 훨씬 예술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가치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격의 차이일 뿐, 예술의 영역이란 이유로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 플래너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음악 산업이라면 작사가나 작곡가, 영화 산업이라면 시나리오 라이터나 감독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죠? 이들은 '고객이 원하는 것'을 좇으려 하기 보단, 자신이 만들고 있는 콘텐츠의 퀄리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최대한 완성도 높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크리에이터'라고 인정받으며, 본인들 역시 그러한 마인드를 지니고 일을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례도 많겠지요. 재능이 뛰어나신 분들은 감각적으로 대중이 원하는 것을 캐치하면서도 작품의 완성도까지 높이는 내공을 보여주시기도 하지만, 천재들의 사례는 일단 예외로 해 두겠습니다. ^^ 완벽한 재능은 프로세스의 모순을 뛰어 넘는 결과를 보여주겠지만, 이미 문화 산업이 '산업'인 이상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개개인의 재능에만 맡겨둔 채 눈앞에 뻔히 보이는 모순을 방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게임 디자이너(Game Designer)는 (다른 산업의 기준에서 볼 때) 절대로 기획자가 아니며, (천재가 아닌 이상) 기획자가 되어서도 곤란합니다. 게임 디자이너는 오로지 자신이 만들 게임 요소가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만을 신경써야 합니다. 시스템 디자인이 되었든, 레벨 디자인이 되었든, 퀘스트 디자인이 되었든, 자신이 만든 게임 요소가 게임의 전체 컨셉과 어울리는지, 논리적으로 모순은 없는지, 난이도가 너무 높거나 낮은 것은 아닌지 등등 '게임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기획자는 숲을 봐야 하고, 프로그래머는 나무를 봐야 한다'고 말하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기획자는 플래너이지 디자이너가 아닙니다. 게임 디자이너는 프로그래머와 함께 나무를 봐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가 봐야 할 나무의 종이 'Narrative'가 됐든, 'Ludology'가 됐든, 'HCI'가 됐든, 분명히 디자이너가 전담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키워야만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들이 프로그램 팀 및 그래픽 팀이 심은 나무와 합쳐져서 제대로 된 숲이 될 것인지 감독하는 게 디렉터의 역할일 것이며, 숲 만드는 데 천년 만년이 걸려서 강산이 변하지 않도록 일정을 조율하는 게 PM의 역할일 것이고, 만들어진 숲이 과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숲인지 고민하고, 다른 숲들의 추세는 어떤지 끊임없이 연구하는 게 기획자(플래너)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 런데, 적어도 제가 블로그 등 2차적 시각을 통해 살펴본 바로는, '게임 디자이너'로써 일해야 할 많은 사람들이 '플래너'의 마인드를 지니고 있거나, 본인은 '디자이너'의 마인드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플래너'로써의 역할을 요구해 갈등이 발생합니다. 또는, '디자이너'로써의 자의식이 너무 강해, '마케터'가 '플래너'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개발에 참여하려 하면 "개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설친다"고 배척하는 경향도 발생합니다.

'게임 디자인'과 '게임 플래닝'은 분리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분리된 게임 플래닝을 개발 프로세스의 일부로 인정하고, '기획' 과정에서 명확하게 결정된 게임 컨셉과 목표 시장, 재미 요소 하에서 '디자이너'들이 최대한 창의성을 발휘해 완성도 높은 게임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게임 개발 프로세스입니다.

살 짝 바꿔 말해보자면, 게임 디자이너는 '재미 요소'만 죽도록 고민하고, 그래픽 디자이너는 '예쁜 그림'만 미친듯이 고민하고, 프로그래머는 '최적화된 프로그램'만 열심히 고민해도 완성도 높은 게임이 나오기 힘든 상황인데, 여기에서 디자이너가 '이 게임이 팔릴까'까지 고민하고 있으니 결국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팔릴까'하는 고민은 플래너에게로 넘기자는 이야기지요.

 p.s. 지난 번 넥슨에 찾아갔을 때 과연 프로세스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궁금해서 간접적으로 마케터가 개발에 참여하냐고 여쭤봤고, 대답은 긍정적인 쪽이었습니다만, 실제 넥슨에 계시는 분들 블로그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리네요. ㅎㅎ 실제 회사, 특히 게임 업체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에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p.s.2. 일단 '마케터'란 용어 자체가 '기획자'라고 바뀌고, 지금의 기획자가 '게임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게임 외 다른 산업에 있는 '기획' 직군은 대개 전략 기획, 마케팅 기획 등 플래너로써의 업무를 수행하는데, 유독 게임 쪽에서만 기획자의 정의가 저런 쪽으로 굳어져버렸네요. 역시 현해탄 건너 섬나라의 영향인가요 ㅋ 플래너의 명칭이 '마케터'로만 남아있으면, 역시 개발과는 다소 떨어진 직군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드는 것 같아서요.

p.s.3. '디자이너'란 용어가 그래픽 디자이너랑 헷갈려서 문제라면, '게임 디자이너'를 '게임 설계자' 쯤으로 만들어서 부르는 건 힘들까요 -_-;;

출처 : http://elsice.egloos.com/334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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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에서 기획자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퍼온 글입니다.
Planner, Director, Content Designer에 대해 잘 구분지어서 퍼옵니다. :)